IMAGO WORSHIP “몸의 예배” 1. 존재로 드리는 예배(롬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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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 리더 세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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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mans 12:1–2 NKRV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서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는 “몸을 산 제물로 드리는 영적 예배”이다.
산 제물의 예배
몸으로 드리는 산 제물의 예배는 몇 가지 차원에서 정의 될 수 있다.
첫 번째, 존재로의 예배(롬 1:1-2)
첫 번째는 전 인격의 회복을 통해 하나님의 형상(Imago Dei)를 회복하는 “존재로의 예배”이다.
두 번째, 공동체적 예배(롬 1:3-13)
두번째는 서로 헌신하고 수용함을 통해 세워가는 “공동체적 예배”이다.
세 번째, 일상 예배(롬 1:14-21)
그리고 구체적 action & reflection을 통해 ‘오늘이라는 예배를 세워가는 “일상 예배”이다. 그렇게 볼 때, 로마서 12장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절과 2절의 존재로의 예배, 3절에서 13절까지 공동체 예배, 14절에서 21까지 일상 예배이다.
John Calvin의 예배에 대한 정의
예배는 거룩과 진실한 하나님에 대한 경외로서, 예배의 기초는 하나님을 사실 있는 그대로의 모든 덕, 의로우심, 거룩, 지혜, 진리, 능력, 은혜, 관용, 생명 및 구원의 유일한 원천으로 인정하는 일이다.(John Calvin)
예배는 영적 학습의 현장이다
예배는 하나님의 존재를 탐구하는 영적 학습의 현장이다. 하나님이 누구이신지와 하나님이 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배운다. 그분을 믿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어떤 일이 일어나야하는지를 발견한다. 무엇을 주의해야 하고, 어떤 가치와 사고체계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지를 탐구한다.
예배는 재 창조의 시간이다.
예배는 성령의 운행하심이 일어나는 재 창조의 시간이다. 성령은 성육신 하신 예수로 인해 영혼육 전체가 온전히 새롭게 창조되었음을 매 순간 깨닫고 발견한다.
으로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성령의 운행하심이 일어나는 재 창조의 시간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시는 우주적 사건이, 성육신 하신 예수의 낮아짐처럼 현재의 시간과 공간속에 임하는 순간이다. 예배는 창조주 하나님과 구원자 예수님, 보혜사 성령님이 죄와 불순종으로 수치와 절망으로 살아가는 모든 인생을 자유와 풍요가 넘치는 에덴으로 회복시키는 영광스러운 구원의 시간이다.
하지만, 이 영광스러운 새 에덴에서도 태초의 아담처럼 불순종의 예배가 어김 없이 발생한다. 약속을 어기고, 하나님과 자신과 이웃을 속이며, 다른 것을 욕망하고, 새로운 구원을 찾는다. Calvin은 로마서 12장 1절과 2절을 통해, 참된 예배와 그릇된 예배를 구분하고, 하나님께 영으로 드리는 영적 예배인 “참된 예배”가 회복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참된 예배”는 몸을 산 제물로 바치는 예배로서, 모든 성도가 도달해야 할 상태를 의미한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시간인 “존재로 드리는 예배(Imago Worship)”에 대해 살펴보려고 한다.
[본론]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 것이다.
‘본받지’(συσχηματίζω)는 동사로 “순응하다, 본받다”라는 뜻으로서, 행동양식이나 사회적으로 유사하게 되거나 비슷해 지거나, 특정한 패턴으로 형성되는 것을 의미한다.
현대 사회는 똑같은 교육 과정과 성공이라는 동일한 목표점을 향해 달려가도록, 비슷한 생각과 유사한 행동양식을 가질 것을 요청한다. 다름을 수용하지 않을 뿐 아니라, 허용조차 하지 않는 규격화된 성장기를 지나온 사회 구성원은 자연스럽게 이 세대에 속한 사고체계와 행동양식에 속하게 된다. Lesseli Newbeggin은 자연적 무신론자를 양산하는 초중고 교육에서 아이들을 해방시키는 것이 교회의 목표라고 이야기 할 정도이다. 이 사회의 모든 시스템과 메카니즘은 이 세대를 철저히 본받은 지성과 감정과 의지를 형성하도록 돕는다. 그렇기 때문에, 영적 유월절을 경험 할 수 없다면, 포로된 이 세대에서 벗어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영적 유월절을 경험한 그리스도인의 경우에도 이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포로된 문화와 사회적 관계망 안에서 신앙과 믿음의 정절을 지키는 것은 심히 어렵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 쉴 사이 없이 유혹하기 때문이다 (요일 2:16). 탐욕과 탐심, 탐식과 비교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할 뿐 아니라, 더 많이 가지고 누리고 취하고 싶은 욕심의 노예가 된다. 430년에 걸친 포로의 삶은, 아무리 위대한 기적이라 해도 그 변화를 오래 유지하지 못하게 하고 다시 포로의 자리로 돌아간다. 십자가로 영적 출애굽을 경험했다 할지라도, 포로 되었던 옛 사람의 생각과 삶의 태도로 돌아가는 것은 너무나 쉽다.
그리스도를 부정하고 부인하며 브라이도리온을 빠져 나간 베드로처럼, 일상을 살아갈 때가 많다. 극심한 후회와 좌절로 인해 주님 앞에서 다시 얼굴을 들지 못할 때가 부지기수다. 잦은 실패의 반복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존재가 되었음을 망각하게 할 뿐 아니라, 믿음의 용기와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열정이 사라진 무미 건조한 신앙 생활을 연명한다. 죄책감과 자괴감의 수렁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옆에 있는 동료까지 빠져들게 한다. 신앙은 성장할 수 없고, 오히려 부정과 불평, 불안정과 불만으로 역행하는 성도가 된다. 외부적 요인을 탓하고 핑계대며 불화하거나, 내부적으로 한 없이 깊은 수렁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는 매너리즘에 빠진다.
이렇듯, 예배는 유월절을 망각한 성도를 다시 회복시키는 영적 출애굽이다. 하나님과 독대하여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여 듣는 개인적 예배를 통해, ‘두 세 사람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거하심(마 18:29)’을 인격으로 경험하는 소그룹 예배를 통해,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모든 일그러진 질서를 회복시키는 강권적인 기적과 역사의 현장인 대그룹 예배를 통해 영적 출애굽에 이른다. 어린양의 피로 죽음에서 해방되었을 뿐 아니라, 오랜 파라오의 포로에서 자유케 되었음을 다시 기억하게 재 확신의 과정이다. 광야의 여정에서 목 마름과 배 고픔으로 인해 다시 돌아가고자 발버둥치는 욕망을 짖누르고, 안정된 집과 소유가 없는 나그네 인생에 대한 불안을 그치며, 사막의 온갖 위협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발견하는 ‘영적 만나’이다. 언제 당도할지 모르는 보이지 않는 가나안을 향한 약속을 굳게 믿고, 낙망하지 않고 끝까지 견디는 구원의 실재이다.
하나님은 예배를 통해 ‘이 세대를 본받지’ 않아야 함을 반복적으로 내려 주신다. 하나님의 백성은 광야의 여정이 끝날 때까지, ‘영적 만나’를 거두어야 한다. 예배는 ‘이 세상’의 방법으로 거둘 수 없을 뿐 아니라, 거두어서도 안 된다. 욕심을 부릴 수도, 게으름을 피울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예배는 은혜, 주도, 자족(비교하지 않음), 상호 신뢰로 거두어야 한다.
은혜로 저항하라!
예배를 거둘 때,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성실’이다. 안산동산교회 김인중 원로 목사의 목회의 핵심 단어는 “단순, 지속 반복”이었다. 예배야 말로 “단순, 지속, 반복” 될 때, 그 진가를 발휘할 수 있다. 만나의 유통기한은 하루를 넘지 않았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은 매일 만나를 거두기 위해 광야로 나서야 했다. 영적 만나인 예배의 유통기한도 분명히 존재한다. 이 세상의 유혹이 빗발치기 때문이다. 빗발치는 유혹의 세상에서 생존하기 위해 예배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다.
류승완 감독의 영화 ‘부당거래’ 에서 주양 검사 역을 맡은 류승범의 강렬한 연기 덕분에 “호의가 계속되면은, 그게 권리인 줄 알아요!”라는 대사가 한 때 인터넷 커뮤니티를 달구었다. 호의가 특권이 되는 순간, 더 이상 호의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전락해 버리는 상황을 의미한다. 출애굽을 시작한지 1년 3개월 후에 백성은 시내산에 도착하게 되었고, 거기에서 만나를 먹었다 (출 16장). 시내산 11개월의 시간 동안 십계명으로부터 시작하여, 성막과 제사의 모든 규례를 제정했다 (출 19~40장, 레위기 전체, 민수기 (1~10장). 그 이후 광야로 이동하면서, 고기가 없는 것을 불평한다 (민 11:4~6). 호의가 권리가 되는 순간이다.
예배는 권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자녀에게 허락하시는 엄청난 호의이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주신 은혜에 감격하고, 자격 없는 나를 자녀 삼아 주심에 감사하고, 자기를 낮추어 종의 형채를 가지사 대신 죽으심의 영광을 찬송하도록 부르신 호의 말이다. 그곳에는 감격, 감사, 찬송이외에 존재 할 수 없다.
안타깝게도 시내산에서의 11개월이 지나가면, 예배는 어느새 은혜가 아닌 권리로 인식되기 시작한다. 그 틈을 타 무감각과 불평이 스며든다. 한때 달콤했던 말씀은 밋밋해지고, 구원의 감격은 반복 속에서 내성이 생겨 익숙함으로 변질된다. 섬김과 헌신의 근원이 되었던 지체를 향한 사랑은 방향을 잃고, 기쁨의 헌신은 지겨움과 억울함으로 버텨내는 고행이 된다. 찬송 가운데 일렁이던 감동은 게눈 감추듯 사라지고, 영원함에 대한 소망은 손에 잡히지 않는 뜬구름처럼 허망하게 느껴진다. ‘메추라기’가 필요하다며 탄원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전처를 보는 듯 하다.
다시 ‘은혜’로 돌이켜야 한다. 그러나 예배의 은혜는 어떤 특별함이나 자극적인 새로움으로 회귀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하나님은 때때로 ‘메추라기’를 보내시지만, 목마르다고 해서 탄산음료를 요구할 수는 없다. 예배의 은혜란, 지금까지 이미 누려왔던 은혜를 다시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곧 ‘구원의 감격’이 회복되고, 잊혔던 ‘첫 사랑’이 다시 깨어나는 일이다. 그때 말씀은 다시금 날선 검처럼 심령을 찔러 쪼개고, 찬양은 무뎌진 가슴을 뛰게 하며, 섬김과 헌신은 억지의 의무가 아니라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예배자는 매 순간 자신이 코람데오(Coram Deo), 곧 하나님 앞에 서 있음을 자각하게 되고, 그분의 사명과 소명이 나를 붙들어 살게 하신다는 사실을 신뢰하게 된다.
그래서 감정이 요동치고 고난이 밀려와도, 이전보다 덜 절망하고, 덜 불안하며, 덜 두려워하게 된다. 평생 붙들려 있던 악습과 중독에서 벗어날 용기가 서서히 생겨나고, 한 걸음씩 내딛으며, 반복되는 실패 앞에서도 묵묵히 자기 몫의 여정을 걸어간다. 한때는 깃대만 꽂으면 곧장 기적과 부흥이 일어날 것처럼 기대했지만, 변화의 조짐이 보이지 않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때조차 포기하지 않는다.
특별한 열매와 눈에 띄는 결실이 없어도, 기대했던 일들이 낙수처럼 흩어지고, 새로운 도전을 생각하면 막막함과 부담이 앞설지라도, 여전히 서 있어야 할 자리를 지켜내고 있다면, 그 사람은 은혜 가운데 머물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9년이 지난 데이처치의 이야기가 그러하다. 누군가는 굽이치는 계곡의 급류를 타고, 아슬아슬한 고갯길을 운전하듯 대담한 결단으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이끌어야 한다. 그러나 또 누군가는 흐름의 한가운데 박힌 바위처럼, 급류를 온몸으로 막아내며 그 자리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데이처치는 후자를 선택했다. 앞으로 나아가지 않아서가 아니라, 지켜야 할 자리를 포기하지 않기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은혜는 늘 전진의 언어로만 말해지지 않는다. 때로 은혜는 머무름의 언어로, 지속의 언어로, 그리고 포기하지 않음의 언어로 증언된다. 그렇게 오늘도 같은 자리에서 예배하며, 같은 부르심을 붙들고 살아가는 삶 자체가 이미 은혜의 가장 분명한 열매이다.
주도적이 되라!
예배를 거두는 일은 철저히 ‘주도적’이어야 한다. 누군가 대신 거두어 줄 수 없고, 그럴수도 없다. 물가에 도착해다고 해서, 무조건 은혜의 생수를 마시게 되지 않는다. 사망에서 생명으로의 영적 유월절은 주도적으로 각 가정의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를 바르고, 그 안에 모두 머물러야 한다. 문설주에 피를 바르지 않았거나, 그 안에 머물지 않았다면, 누구든 사망을 피할 수 없었다. 광야의 모든 과정은 주도적 선택이었다. 모세가 십계명을 위해 시내산에 올랐을 때, 이스라엘은 오랜 기다림을 선택할 수도 있었고, 반대로 황소 우상을 만들어 세우고 불안 해결을 선택할 수도 있었다. 말씀대로 만나를 거둘 수도 있었고, 욕심대로 거둘 수도 있었다. 그 모든 선택은 자신들 스스로에게 달려 있었다.
예배는 철저히 주도적 메카니즘 안에서만 순항한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구원하시기 위해, 구원 받은 이들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철저히 주도적으로 앞서 일하신다. 포로된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지도자 모세를 불붙은 떨기 나무로 부르시고, 소명과 사명을 허락하신다. 홍해를 가르시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시며, 만나와 메추라기로 배풀리시고, 반석에서 물을 내신다. 구원 역사가운데 하나님은 한 번도 소극적이신 적이 없다. 지금도 하나님은 예배 가운데 소명과 사명을 주시고, 기적을 일으키시며, 앞길을 안내하시고, 배고픔과 갈증을 해결하신다.
하나님의 역사의 또 다른 메카니즘은 지도자 모세의 주도적 순종이다. 모세의 순종이 없었다면, 현재의 출애굽과 같은 모습은 없다 (모세가 아닌 여호수아의 출애굽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일어났을 것이다). 모세의 순종은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혈기왕성한 이집트 왕자가 아니라, 노쇄한 광야의 목동을 쓰시기 때문이다. 이것은, 리더의 주도적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리더의 주도적 태도란, 사역의 주체가 ‘나’에게서 ‘하나님’께로 완전히 옮겨진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책임을 회피하는 소극성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하시도록 자신을 내어드리는 적극적 순종의 태도이다. 주도권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참된 리더십이 시작된다.
능력과 의지
하나님의 하나님의 사역에는 왕자가 아니라 목동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이미 갖추어진 능력 때문에 사람을 사용하지 않으시고, 능력을 하나님께 구할 줄 아는 태도를 통해 일하신다. 탁월한 설득의 기술이나 관계적 카리스마가 사역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며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다리는 겸손한 침묵 속에서 하나님은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리더의 핵심 과제는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자기 ‘의지’를 내려놓는 일이다. 하고 싶은 것을 밀어붙이는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향 앞에 기꺼이 멈추고, 바꾸고, 포기할 수 있는 의지 말이다. 하나님의 뜻은 강한 의지를 통해 관철되는 것이 아니라, 복종된 의지를 통해 성취된다.
열매
주체가 하나님께로 옮겨진 리더십은 열매의 기준부터 달라진다. 눈에 보이는 성과, 속도, 확장, 숫자가 리더의 정당성을 증명하지 않는다. 오히려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열매, 곧 사람의 변화와 공동체의 방향성이 열매로 평가된다.
이러한 열매는 즉각적이지 않으며, 종종 느리고 답답해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사역의 열매는 억지로 만들어낸 결과가 아니라, 때가 차면 자연스럽게 맺히는 결실이다. 리더는 열매를 생산하는 사람이 아니라, 열매가 자랄 수 있는 환경을 지키는 사람이다. 그 자리를 끝까지 지켜내는 인내 자체가 이미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가 된다.
훈련과 시행착오
하나님은 리더를 단번에 완성된 상태로 사용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훈련과 반복되는 시행착오 속에서 주도권을 하나님께 내어맡기는 법을 배우게 하신다. 실패는 리더십의 결함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의 리더십으로 재정렬되는 과정이다.
주체가 나에게 있을 때 실패는 치명적이지만, 주체가 하나님께 있을 때 실패는 훈련의 일부가 된다. 하나님은 실수 속에서도 방향을 가르치시고, 넘어짐 속에서도 겸손을 빚으신다. 중요한 것은 실패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실패 이후에도 다시 하나님의 뜻을 묻고, 그분의 인도하심을 신뢰하며 다시 시도할 수 있는 태도이다.
자족(비교하지 않음)
예배를 거두는 세 번째 원리는 자족이다.
16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시기를 너희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이것을 거둘지니 곧 너희 사람 수효대로 한 사람에 한 오멜씩 거두되 각 사람이 그의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거둘지니라 하셨느니라 17 이스라엘 자손이 그같이 하였더니 그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나 18 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더라 (출 16:16~18)
영적 만나의 가장 큰 특징은 부족함이 없다는 것이다.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다. 이 놀라운 비밀로 초대하는 예배는 우리를 자족의 자리로 이끈다. 그 자리에서는 서로를 비교하지도 않고, 비교당하지도 않는다.
이미 임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는 결핍이 필연적이다. 많이 가진 자와 적게 가진 자가 있고, 강한 자와 약한 자가 공존한다. 소유와 조건의 차이는 기울어짐을 만들고, 그 기울어짐은 불공평한 구조를 형성한다. 이 불공평한 세상에서 부족함 없이 살아가는 유일한 길은 자족이다.
그러나 자족은 체념과 전혀 다른 개념이다. 자족이 ‘스스로 만족함’이라면, 체념은 ‘스스로 포기함’이라 할 수 있다. 결핍은 모든 사람에게 자연스러운 상태이지만, 모든 결핍이 반드시 포기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결핍 그 자체가 아니라, 결핍을 대하는 태도라 할 것이다. 결핍이 자족으로 승화 될 때, 결핍은 더 이상 우리를 무너뜨리는 부족함으로 기능하지 않고, 오히려 풍족함으로 전환되는 역설을 경험한다.
이 역설은 ‘상처 입은 치유자’라는 기적을 낳는다. 결핍과 상처를 부정하거나 숨기지 않고, 그것을 끌어안은 채 살아갈 수 있게 될 뿐 아니라, 누군가를 해치던 연약함은 다른 이를 품을 수 있는 공간으로 작용한다. 결핍은 사명이 되고, 약함은 통로가 된다.
예를 들어, 열등감과 외모 콤플렉스로 인해 스스로를 축소하며 살아왔던 한 사람은, 그것을 극복해야 할 결함으로만 여기지 않고 자족의 자리로 가져갈 때 전혀 다른 삶을 경험하게 된다. 타인의 시선에 민감했기에 생겨난 감수성은, 사람의 마음을 섬세하게 읽어내는 능력이 되고, 자신을 드러내기보다 관찰해 온 시간은 감각적인 통찰과 표현력으로 변한다. 결핍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그 결핍은 더 이상 삶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고유한 통로가 된다.
영적 만나는 우리의 결핍을 제거하지 않는다. 대신 그 결핍이 더 이상 우리를 규정하지 못하도록 한다. 예배는 결핍 없는 삶을 약속하지 않지만, 결핍 속에서도 부족하지 않게 사는 길로 우리를 초대한다. 그곳에서 우리는 비로소 비교에서 자유로워지고, 이미 주어진 은혜 안에서 충분히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이것이 영적 만나가 빚어내는 자족의 삶이다.
상호 신뢰
예배는 홀로 거두는 성취가 아니라, 상호 신뢰 속에서 함께 거두는 열매이다. 출애굽은 개인의 탈출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 사건이었고, 그 구원은 언제나 예배 공동체라는 틀 안에서 완성되어 간다. 그러므로 예배 공동체는 개인의 신앙 열심만으로 유지되지 않으며, 서로를 신뢰하는 관계를 전제로 서 있다.
아말렉과의 전쟁은 이 진리를 가장 선명하게 드러낸 장면이다. 산 위에서 모세가 손을 들고 기도할 때 전쟁의 흐름은 바뀌었고, 그 손이 내려올 때 이스라엘은 밀렸다. 그러나 그 전쟁의 승리는 모세 개인의 영적 능력 때문이 아니었다. 모세의 팔을 붙들어 올린 아론과 훌, 그리고 전장 한복판에서 실제 싸움을 감당하던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군사들 사이에 형성된 상호 신뢰의 연결이 승리를 가능하게 했다.
기도하는 자와 싸우는 자, 앞에 선 자와 뒤에서 받쳐 주는 자, 보이는 자리와 보이지 않는 자리가 서로를 의심하지 않고 각자의 자리를 지켜냈을 때 공동체는 무너지지 않았다. 만일 아론과 훌이 “왜 모세만 손을 드는가”를 문제 삼았다면, 혹은 여호수아가 “기도가 아니라 전략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면, 그 전쟁은 다른 결과를 맞이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의 역할을 비교하지 않았고, 각자의 자리에서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방식을 신뢰했다.
예배 공동체도 이와 같다. 누군가는 앞에서 인도하고, 누군가는 묵묵히 받쳐 주며, 누군가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흐름을 지킨다. 예배는 이 역할들이 균형을 이룰 때 비로소 살아 움직인다. 상호 신뢰가 무너지면 예배는 곧 경쟁이 되고, 비교가 되고, 결국 각자의 싸움으로 전락한다. 그러나 서로를 신뢰할 때, 예배는 공동체 전체를 살리는 능력이 된다.
출애굽 이후의 여정이 끊임없이 공동체를 요구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나님은 개인의 신앙 영웅을 세우기보다, 서로 기대고 의지하는 백성을 빚으신다. 예배는 그 훈련의 중심에 있다. 예배 가운데 우리는 “내가 얼마나 잘 예배했는가”를 묻기보다, “우리가 함께 하나님 앞에 서 있는가”를 배운다.
결국 예배는 신뢰의 고백이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이 세우신 공동체를 신뢰하는 고백. 그 신뢰 위에 세워진 예배 공동체는 전쟁 같은 현실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마침내 하나님이 주시는 승리를 함께 거두게 된다.
형상의 예배
산 제물되신 그리스도로 인해, 그의 백성은 새로운 존재로 변화되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바 된 하나님 나라 백성이다. 여전히 이 세상에 속하였으나, 오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하는 하나님 나라의 대사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고린도후서 5:20, NKRV).
‘사신이 되어’(πρεσβεύω)는 1인칭, 복수, 현재, 능동태 동사로 사용되어 ‘대사로서 행동하다’라는 의미를 가진다. 한 주권자나 나라로부터 다른 주권자나 나라에 대한 권위를 부여받은 대표로 행동한다는 뜻이다. 예배 공동체, 곧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권세를 위임 받은 대표로 부름 받은 자들이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 다운 삶을 살아야 할 권한과 막중한 책임이 있다.
문제는 우리가 이 세상의 풍조와 공중 권세 잡은 자에게 사로잡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새로운 존재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그 사실을 망각한 채 살아간다는 데 있다(엡 2:2). 그 결과 십자가의 죄 사함은 값싼 구원으로 전락하고, 은혜의 가치는 무뎌지며, 그 영광의 무게는 바닥으로 곤두박질친다. 이는 구원이 실제로 하찮아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 가치를 축소 해석했기 때문이며, 애초에 그 영광의 크기를 잘못 가늠한 데서 비롯된 비극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결코 값싼 은혜가 아니다. 다만 우리가 세상의 기준으로 그것을 재단할 때, 구원의 깊이는 얕아지고 영광의 광채는 흐려진다. 새로운 존재로 부름받았음에도 옛 질서에 묶여 살아갈 때, 우리는 이미 주어진 자유를 누리지 못한 채 스스로를 다시 종의 자리로 되돌려 놓는다. 이 망각이야말로 신앙의 가장 치명적인 위기이다.
이 망각의 상태를 김형국은 「풍성한 삶의 기초 」에서 ‘성도의 허우적거림’이라 표현하며,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존재가 되었음에도 아직 그 정체성에 완전히 적응하지 못한 상태라고 설명한다. 새로운 존재로의 적응은 단번에 완성되는 변화가 아니라, 평생에 걸쳐 이루어 가야 할 영적 숙원 사업이다. 그것은 단기 프로젝트처럼 성취할 수 있는 과제가 아니라, 성령과 더불어 영원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도전해야 할, 경건에 이르는 훈련이다(딤전 4:7).
그 이유는 분명하다. 새로운 존재가 되었음을 매 순간 자각하며 살아가려는 성도의 수고보다, 세상 풍조와 사단의 열심이 언제나 훨씬 더 집요하고 강력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성도를 넘어뜨리기 위해 우는 사자처럼 날카롭고 치밀하게 접근하며, 공격하고, 미혹하고, 설득한다(벧전 5:8). 그 공격은 추상적이지 않다. 재정적 압박과 건강의 적신호, 억울하고 불합리한 사회 구조, 정서적 탈진과 소진, 복잡하고 단절된 사회적 관계망, 그리고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수많은 사회적 문제들 속에서 그 유혹은 화려하고도 다양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성도는 쉽게 자신이 누구인지를 잊고, 다시 옛 존재의 방식으로 허우적거리게 된다.
그러므로 끝까지 견디어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새로운 존재의 삶이 자동으로 유지될 수 있다는 안일함에서 벗어나야 한다(마 24:13). 구원의 삶은 저절로 굴러가는 상태가 아니라, 의식적이고 의도적인 선택을 요구하는 수고스러운 여정이다. 이는 일시적인 열심으로 완주할 수 있는 길이 아니며, 끝까지 버텨 내는 신실한 지속성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반복적으로 다시 세우는 특단의 조치를 포함한다. 이와 같은 지속적인 훈련과 인내의 시간 속에서만, 성도는 ‘허우적거림’의 단계를 지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새로운 존재로서의 삶에 점차 익숙해져 간다. 구원은 단번에 주어졌지만, 그 구원을 살아내는 삶은 평생에 걸쳐 배워 가야 할 순종의 여정이다.
하나님이 순종의 여정을 향해 달려가는 성도에게 허락하신 특단의 조치가 ‘예배’이다. 예배는 이 세대가 아니라, 오는 세대 곧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다시 초점을 맞추도록 수정하는 ‘새 사람 에프터 서비스’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새 사람이 되었지만, 수십 년간 익숙했던 옛 사람을 벗어버리는 과정은 쉽지 않다. 굉장히 어렵다. 그 과정은 시간과 노력, 반복과 지속의 과정을 거쳐 가야 한다. 수 없이 많은 시행착오를 격어내어야 할 뿐 아니라, 극심한 외로움과 좌절의 시간을 거쳐야 한다.
‘연단’(δοκιμή)
그런 예배자의 삶을 바울은 ‘인내와 연단을 통과하여 소망을 이루는 여정’이라 설명한다. (롬 5:4~5).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는 새 사람을 이해하려면 인내와 연단을 바르게 해석해야 할 필요가 있다.
‘연단’(δοκιμή)은 시험, 시련, 혹은 검증으로서, 어떤 사람이나 사물에 대해 입증되거나 승인된 성품을 의미한다. 이 단어는 단순히 시험의 과정 자체만이 아니라, 그 시험을 통과함으로써 드러난 ‘검증된 상태’ 또는 ‘참됨이 증명된 결과’에 초점을 둔다. KJV (King James Version)은 ‘연단’을 ‘expierence’(경험)으로 번역하여, 시험을 통과한 존재의 경험을 강조한다. 시험이 없는 인생은 존재하지 않으며, ‘인내’를 거치지 않고 삶을 통과하는 길은 없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느냐의 여부와 상관없이 모든 사람은 인내의 과정을 통과하지만, 그 속에서 ‘연단’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응답하느냐에 따라 참된 성도의 모습이 드러난다.
고대 그리스에는 Aristotle의 교육 사상에서 유래한 격언으로, “ἡ μὲν ῥίζα τῆς παιδείας πικρά, ὁ δὲ καρπὸς γλυκύς.” (교육의 뿌리는 쓰나, 그 열매는 달다)라는 말이 전해진다. 이 격언은 후대에 이르러 의미가 압축·변형되어 “인내는 쓰다”라는 표현으로 널리 사용되었다. 시험을 경험하는 모든 인간은 궁극적으로 달콤한 열매를 맺기 위해, 그 과정에서 요구되는 쓴 인내를 견뎌내려 애쓴다. 그러나 그 인내는 정면 돌파의 형태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인내하는 사람들은 고통 그 자체에 집중하지 않기 위해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거나, 고통을 회피하는 전략을 선택한다. 때로는 대체 가능한 행복을 찾아 몰입하고, 그것에 심취함으로써 현재의 고통을 상쇄하려 한다. 이 과정에서 인간은 고통에 직면하지 않기 위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활용하여 우회로를 선택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의식의 표면에서 사라진 고통을 이미 극복된 것으로 오해하고, 실상은 수면 아래 깊이 가라앉아 있는 감정과 기억이 다시 떠오르지 않도록 억누르며 생을 살아간다. 그러나 이러한 억압과 회피는 고통의 소멸이 아니라, 단지 그 지연된 표출을 의미할 뿐이다.
‘성도의 인내’는 이와 같은 방식과는 차이가 있다. 고통을 억누르거나 회피하는 방식으로 인고의 시간을 연장하지 않을 뿐 아니라, ‘시간이 약’이라는 말에 자신을 맡긴 채, 목적 없는 견딤을 미덕으로 삼는 어리석음을 선택하지도 않는다. ‘성도의 인내’는 소모되거나 방치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새로움으로 돌이키기 위한 하나의 이정표이다. ‘성도의 인내’는 갑작스러운 고통으로 인해 길을 잃었거나 갈림길 앞에서 혼란스러워하는 영적 미아를, 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해 켜지는 하나님의 방향지시등과 같다. 하나님은 고통을 통해 성도를 멈추게 하시고, 돌아보게 하시며, 다시 나아갈 방향을 분명히 드러내신다. 그러므로 성도의 인내는 단순한 참음에 머물러서는 안 되며, 반드시 ‘연단’으로 이어져야 한다. 그것은 성도의 인격(character, NIV)이 하나님을 더 깊이 경험하게 되는 경험(experience, KJV)으로서의 연단이다. 이 연단의 시간을 통해 성도는 ‘이 세대를 본받지 아니하고’,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이미 성취된 ‘오는 세대’를 발견하며, 그 현실을 현재 속에서 경험하는 삶으로 부름받는다. 이것이 바로 참된 성도로서 살아낸다는 것의 의미이다.
성령
새 사람으로서 변화의 여정은 아무리 강인한 존재라 할 지라도 혼자서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버거운 작입이다.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는 여정은 복잡하고 난해한 과정을 지나가야 하기 때문에, ‘새 사람 에프터 서비스’ 전문가이신 성령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다. 성령이 거하시는 곳에 머물며, 다시 진단하고, 새롭게 치료하며, 구체적으로 재활하고, 영적 습관이 될 때까지 지속적으로 지속하고 반복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쉽사리 옛 사람의 습관과 생각으로 돌아가 버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성령안에 거할 때(In), 옛 사람으로 돌아간 어리석을 깨닫게 하시고 (See), 회개함으로 다시 돌이키게 하신다 (Turn). 하지만, 거함을 잃으면 다시 옛 사람으로 회기한다 (Back).
이 세대는 끊임없이, 강력하게 옛 사람의 습관과 생각으로 돌아가도록 유혹한다. 힘겨운 다이어터에게 햄버거를 들이밀고, 열심인 러너에게 따뜻한 이불 속에 머물것을 권면한다. 짜릿한 쾌락과 세상 위에 군림하는 성공의 멋을 정당화하면, 다시금 옛 사람으로 돌아갈 것을 회유한다. 옛 사람의 거짓된 맛과 멋이 주는 달콤함을 알기에 새 사람의 삶은 요동치고, 혼란함에 빠진다. 옛 사람의 습관으로 돌이키는 과정은 수고스러운 노력의 동반이 필요 없는, 지극히 자연스럽고 쉽다. 격려하거나 지지하지 않아도 옛 사람은 아주 손 쉽게 원래 자기의 자리를 찾아 회귀한다. 상류로 거슬러 오르기 위한 수고가 아니라, 바다로 달려가는 급류처럼 순식간에 이동한다. 급류를 가로막아 서는 거대한 댐이 없다면, 옛 사람을 향해 달려가는 물줄기를 멈출 방법이 없다.
예배는 옛 사람으로 회기하고자 달려가는 급류를 멈추어 서는 영적 댐이다. 성령은 예배를 통해 균혈이 일어난 댐을 보수하고, 훼파된 댐을 재건한다. 잃어버린 새 사람의 감각을 되찾게 해주고, 새 사람의 영적 습관이 정착 될 수 있도록 한다. 은혜는 새 사람으로 돌이키는 힘으로, 옛 사람에 묶여 있여 헤어나오지 못하고 허우적 거리는 성도를 자유케 한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그리스도 안에서 무한대로 주시는 그의 능력을 소유한 존재임을 깨닫고, 구체적으로 그 능력을 활용하고 사용할 수 있는 지혜를 허락하시는 현장이다. 반복적이고 습관적인 은혜의 망각으로 십자가에서 일어난 신분의 변화조차 잃어버린 어리석음에서 돌이켜 죄에 대해서 죽고 의에 대해서 살아났음을 깨닫도록 한다 (벧전 2:24). 더 이상 옛 사람의 수렁에 이끌려 죄책과 자책, 절망과 수치의 목줄을 기꺼이 차고 살아가는 미련함에서 벗어나도록 독려한다.
새 사람과 옛 사람의 힘겨운 줄다리기는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성도의 일상에서 일어난다. 성령의 도우심이 아니면, 영적 줄다리기에서 참패를 당하는 것은 불보듯 뻔하다. 영적 줄다리기에서 참패한 성도의 특징은 죄책감의 노예가 되어, 그리스도 안에 있는 풍성함을 누리지 못한다. 매 순간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고해성사’에 급급한 나머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광과 진리를 볼 수 없다.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고백하고 영접하는 모든 사람의 죄는 이천 년전 갈보리 십자가에 위에 전가되어 죽임을 당한다. 더 이상 죄의 책임은 존재하지 않고, 죄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없다. 결과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죄책감은 이미 해결된 문제를 다시 붙드는 어리석음이나 미련함으로, 스스로의 죄를 책임지겠다는 또 다른 측면의 ‘교만’이다. 죄에 대한 책임은 골고다의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모두 다 해결하셨다. 성도는 죄에 대한 책임을 지는 자들이 아니라, 죄에 대한 책임을 지신 그리스도를 기억하고 기념하는 자들이다. 예배는 그 그리스도를 기억하고 기념하는 행위로서, 다시오시는 그날까지 지속되어야 할 가장 중요한 의식이다. 이 시간을 통해 모든 죄의 문제가 해결되었음을 깨닫고, 진리로 자유케 된 영적 해방군이 되는 순간이다. 그동안의 모든 억눌림과 억압에서 벗어나, 풍부한 상상력과 소망으로 살아갈 존재가 됨이다.
그 예배는 진실한 맛과 멋을 되찾은 성도가 되어, 이 땅에 빛과 소금으로 부름 받았음을 상기시킨다. 새 사람의 정체성을 상실한 이들을 일깨우고, 새 사람의 풍성함을 놓쳐버린 이들에게 다시 영적 산해진미를 누리게 한다. 예배라는 리사이클링 센타를 통과하면, 볼품 없던 존재가 가장 가치롭고 아름답게 재탄생한다. 폐기되어야 마땅한 인생이 다시 생명력을 얻어 아름답고 존중받는 존재가 된다. 예배는 성도를 새롭게 하는 ‘새 사람 에프터 서비스’ 센터다.
참된 예배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Imago Dei)과 모양대로 지음받았다 (창 1:26~28). 하나님의 내면과 외형, 지성과 감정과 의지, 생명을 불어넣으신 영을 포함해 닮지 않은 부분이 없다. 하지만, 불순종이라는 죄로 인해 이 모든 형상이 일그러졌고, 제 기능을 할 수 없는 왜곡된 상태가 되었다. ‘형제 살인’이 에덴을 벗어난 인류의 첫 번째 사건이라는 것은, 왜곡됨의 심각성을 나타내기 위한 성경 저자의 의도를 담고 있다고 할 것이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단숨에 새로운 신분을 입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분별하게 되고, 그것에 기꺼이, 즉각적으로 응답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을 끊임없이 미성숙의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세상 문화와는 달리, 하나님은 여러분 안에서 가장 좋은 것을 끌어내시며, 잘 빚어진 성숙함으로 여러분을 자라게 하십니다 (롬 12:2, MSG).
세상 문화는 성도를 미성숙으로 끌어내린다. 성도의 미성숙은 세상 문화로 이끄려가는 불순종이라는 사실을 발견해야 한다. 예배는 성도를 미성숙에서 해방시켜, 그리스도 안의 장성한 자의 분량에 이르도록 한다 (엡 4:13). 성장이 없다면 미성숙에 이끌려 가고 있지는 않는지 심각하게 들여다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구원의 감격에서 멀어지고, 꿀송이 보다 더 달콤한 말씀이 상쇄되고, 하나님과의 교제가 우선순위에서 멀리 밀려나 있다면 미성숙으로의 유혹에 이끌려 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성숙
순종(환대)
참고 문헌
Uncategorized References
Babbitt, F.C. "Plutarch's Moralia: The education of children." edited by F. C. Babbitt, 3~69. edited by F. C. Babbitt. Cambridge, Massachusetts: William Heinemann, 1927. https://books.google.co.kr/books?id=1Vh3Ny1ToPsC
Calvin, John. 「종교개혁의 필요성」. 서울: 솔로몬, 1543.
_________.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Edinburgh: Calvin Translation Society. 1845.
Nouwen, Henri J. M. 「상처입은 치유자」. 서울: 두란노, 2022.
Strong, James. A Concise Dictionary of the Words in the Greek Testament and The Hebrew Bible. Bellingham, WA: Logos Bible Software. 2009.
Warren, Tish Harrison. 「오늘이라는 예배: 사소한 하루는 어떻게 거룩한 예전이 되는가」. 서울: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IVP),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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